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생명에는 신비한 측면이 있습니다. 죽어서 살고, 죽어서 살리는 신비가 생명 안에 있습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는 그야말로 죽어 사는 신비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배추가 김치가 되어 사람 몸에 흡수되는 과정에도 죽어서 사는 신비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배추를 일곱 번 죽인다고 합니다. 먼저 땅에서 뽑아 죽입니다. 다음 배추의 배를 갈라 죽입니다. 또 배추를 소금에 절여 죽입니다. 매운 고춧가루와 젓갈에 버무려 죽입니다. 또 장독에 묻어 익혀 죽입니다. 그다음에 익은 배추김치를 꺼내어 칼로 썰어 죽이든지 손으로 찢어 죽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이로 씹어 죽입니다. 김치가 된 배추는 이렇게 죽어 우리 몸을 살립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의 말씀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쓴 바울 사도의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말씀과 믿은 이들의 삶에 대해 긴요한 충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4장에는 우리 안에 담긴 예수 생명의 신비에 대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이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시간 적으로 공간적으로 엄청난 간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현재에 있는 믿는 우리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성령님 교통의 역사입니다.
둘째로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게 마련입니다. 박해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믿음 생활하며 내 생각을 죽이고 내 감정을 죽이고 내 계획을 죽이고 내 선호를 죽여야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죽이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
셋째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난을 이깁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보화가 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방에서 압박받아도 부서지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답답하고 속상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희망을 가집니다. 또 때때로 넘어질 때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기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예수 생명의 신비가 우리 안에서 약동하는 것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