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한국선교(칼 귀출라프) 188주년 기념대회 개최
제1회 한국선교(칼 귀출라프) 188주년 기념대회 개최
  • 김윤환 기자
  • 승인 2020.07.0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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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4 오후2시, 문화의전당

 

▶칼 귀출프 선교비

보령시기독교연합회(회장 안영준목사)는 칼 귀출라프 선교사 기념을 위해 제1회 한국선교 칼 귀출라프 188주년 기념대회를 갖는다고 밝혔다.

오는 14일 오후 2시 문화의전당에서 있을 기념대회에는 1부 보령비바앙상블의 축하연주회를 시작으로, 개회사, 보령시장.국회의원.시의회의장 등 축사 및 격려사, 2부에는 예배가 진행되며, 이어 합동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인 김학유교수의 세미나가 준비됐다.

1832년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웲laff, 1803-1851)의 조선 선교 방문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는 34년,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서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조선을 방문한 것은 2차 선교 여행(1832. 2. 26-9. 5)중 인데 귀출라프는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했던 최초의 서양 선박으로 기록된 에머스트호를 타고 보령 고대도에 정박하고 주변지역을 돌며 선교활동을 했다.

특히 고대도(古代島)는 귀츨라프가 8월 12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선교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고대도를 기점으로 하여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할 수 있었다.

고대도에는 칼 귀출라프의 기념비와 귀츨라프 선교사의 7가지 최초의 기록들이 새겨진 비가 제막되어 있어 한국기독교의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그동안 귀출라프를 기념하기 위해서 대구의 A교회에서 기념센터를 만드는 등 외부에서 진행해 왔지만 올해부터는 보령시기독교연합회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해야 된다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보령시와 보령시기독교연합회의 향 후 활동이 주목된다.

여기에 칼 귀출라프 행사는 한국 역사와 교회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고대도라는 섬 주민들의 행사에만 머무르지 말고 어느 한 교회나 단체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보령시기독교연합회의 입장이다.

따라서 보령시기독교연합회의 주관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순수한 믿음과 마음으로 역사속에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우리의 역사속에서 대한민국과 교회에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귀출라프의 정신을 깊이 새겨 한국교회에 새로운 선교역사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칼 귀출라프

 

[참고]

◆ 칼 귀출라프 선교사는 누구인가?

1832년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웲laff, 1803-1851)이다. 그의 조선 선교 방문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는 34년,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독일 프로이센 제국 프릿츠에서 경건한 기독교 가풍을 가진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프로이센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도움으로, 18세가 되던 해 1821년 독일 최초의 선교사 양성 학교인 베를린 선교학교 (Missionsschule in Berlin)에서 4월부터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베를린 선교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회심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주님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 즉 선교사에 대한 강한 사명을 확립했다.

그 후 귀츨라프는 1823년 부활절부터 베를린 대학교(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중병으로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다. 그 때 네덜란드 선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중병도 그때 기적적으로 나았다.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출발한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 싱가폴, 태국을 거치면서 독립선교사로 전환했다.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방콕에서 선교하면서 태국어로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했다. 실제로 귀츨라프는 언어의 귀재였다. 당연히 모국어인 독일어와 영어, 화란어, 태국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해서 이들 언어로 다양한 저술과 번역 활동을 하였다.

태국에서의 선교 기간 중 1831년은 귀츨라프에게 육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의 아내 메리 뉴엘(Mary Newell, 1794-1831)이 그해 2월 16일에 쌍둥이 여아의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쌍둥이 딸들도 곧 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츨라프의 1차 아시아 선교 여행(1831. 6. 3-12. 13)은 이러한 슬픔을 만난 직후 행해졌는데, 방콕을 출발해서 마카오에 도착하기까지 낡은 중국 돛단배를 타고 중국 연안을 6개월 동안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교하였다.

조선을 방문한 것은 2차 선교 여행(1832. 2. 26-9. 5)동안인데, 마카오에서 출발했다. 그는 선교를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와 용선 계약을 맺은 507톤의 범선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에 선의(船醫)와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다. 이 배는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했던 최초의 서양 선박으로 기록된 바로 그 배이다.

▶중국선원 복장의 칼 귀출라프

1832년 7월 17일 오전 10시경 귀츨라프 일행에게 조선의 연안이 눈에 들어왔으며 오후 5시경에는 처음으로 조선인들과의 우호적인 만남이 있었다. 귀츨라프가 타고 있는 애머스트호가 조선에 최초로 정박한 곳은 몽금포 앞바다의 몽금도(대도) 앞이다.

애머스트호는 다시 남하하여 뱃길을 따라 외연도(7월 21일)-녹도(7월 22일)-불모도(7월 23일)-고대도(7월 25일) 순으로 항해하였다. 특히 고대도(古代島)는 귀츨라프가 8월 12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선교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대도를 기점으로 하여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할 수 있었음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귀츨라프가 국왕을 위해 준비한 진상품에는 지리, 천문, 과학서 외에 천, 모직물, 망원경, 유리 그릇 등의 선물이 있었고 중요한 것은 한문 성경 한 권과 기독교 전도 책자들이었다. 특히 한문 성경은 ‘신천성서’(神天聖書)인데, 이 성경은 중국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으로서 귀츨라프의 동역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1823년 말라카(Malacca)에서 출판한 21권 낱권을 선장본으로 엮어 한 권으로 만든 성경이었다.

귀츨라프가 고대도를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은 문화적 중개 활동으로 이어졌다. 선교하면서 귀츨라프는 조선 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7월 27일 귀츨라프는 오랜 설득 끝에 고관의 비서 양이(Yang-yih)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게 하였다. 또한 그에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면서 읽게 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귀츨라프는 2차 선교 여행 후 이 때 배운 한글을 1832년 11월에 모리슨이 편집자로 있는 ‘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잡지에 소논문 형태로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을 발표하였다.

당시로서는 선교 현지에 와서 현지인을 통해 현지 언어인 한글을 채집하여 서양에 구체적으로 발표한 것은 귀츨라프가 최초였다. 이처럼 귀츨라프의 번역 선교는 현지 방문을 통한 성경 번역 선교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말을 익히고, 한글을 세계에 첫 번째로 소개한 문화적 중개자의 역할도 수행한 것이다.

귀츨라프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빈궁한 삶을 사는 조선인들을 위해 감자를 직접 심고, 생산하는 방법을 글로 써주었다. 이는 한반도 감자 전래의 최초의 구체적 기록이다. 아울러 같은 이유로 야생 포도의 재배와 그것의 과즙제조 방법도 설명해주며 글로 써 주었다. 또한 그는 선교 사역의 한 방편으로서 의술을 베풀며 사람들을 돌보았다.

예를 들면 이미 태국과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고, 어느 날은 독감에 걸린 60명의 노인 환자들에게도 충분한 양의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한 선교지에서 의료적 도움을 주는 것이 그의 열망이라고 하였는데, 그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이 전형적인 그의 선교의 방편이었다. 그가 만약 조선에 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더라면 중국에서처럼 고아원과 학교 같은 사회적 봉사를 통한 선교를 더욱 체계적으로 감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귀츨라프는 조선에서 약 한 달간 선교하면서 얻은 문화적, 지리적 정보를 토대로 조선 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 선교 전략을 세운다. 8월 17일에 애머스트호는 제주도 연안에 도착했는데, 귀츨라프는 제주도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을 잇는 선교기지로서 적합할 것으로 보았다.

귀츨라프의 동아시아 항해기 독문판(1835)에서는 영문판(1834)에서 언급하지 않는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에 관한 언급이 그것이다. 그는 제주도에 선교 기지가 세워진다면 “제주도가 인구가 많은 지역들(조선, 일본, 만주, 중국) 안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최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조선을 위시한 이들 지역에 복음의 전파와 교회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귀츨라프가 조선 선교 시에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한 것처럼, ‘주님의 교회의 확산’(Ausbreitung der Kirche des Herrn)을 소망한 것이다. 이는 선교 거점인 제주도를 사용하여 조선선교,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선교를 피력한 것으로 한반도를 통한 개신교 선교 전략의 최초 입안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remote country)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공원묘지( Hong Kong Cemetery in Happy Valley)의 개신교구역에 안장되었다.

◆ 칼 귀츨라프 선교사의 7가지 최초의 기록

1. 최초로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2. 최초로 한글로 주기도문 번역 시도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단편적이지만 한글 성경번역의 효시라 불릴 만하다.

3. 최초로 한문 성경 전달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 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으며, 순조 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하였다.

4. 최초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체계적으로 소개

당시 조선이 한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만의 문자인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워서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을 소개하여 세계에 알렸다. 그의 영문 소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은 영어권은 물론 독일어로 일부 번역되어 독일어권에 소개 되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5. 최초로 서양 감자의 파종

먹을거리가 제대로 없어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실제로 조선인들의 눈앞에서 보여 주었고, 또한 글로 써 남겨 주었다(1832년 7월 30일). 또한 야생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하였다(1832년 7월 31일).

6. 최초로 서양 선교사로서 서양 근대 의술을 베풂

충청도 기착지인 고대도 도착(1832년 7월 25일) 이후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하였다. 한 예로 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해주었다(1832년 8월 2일). 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의술을 베푼 기록이다.

7. 최초로 동북아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전략의 구상

귀츨라프는 제주도 일대를 둘러본 후, 조선, 중국, 만주, 일본을 잇는 선교기지(Missionsstation)로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선교기지인 제주도를 통해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첫 번째 시작”을 언급하면서 동북아 선교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이러한 귀츨라프의 선교 역사적, 문화적 업적을 볼 때 궁극적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원년의 역사 기록을 기존의 1884년/1885년설에서 1832년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다.

출처 - 칼 귀츨라프 학회 ( https://www.guetzlaff.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