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웅천 평리에서 출생한 김광제지사는 일제의 차관으로 인해 망국의 기로에 놓였던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에서 대구의 거상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발기문"을 발표하고, 동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문에 그 취지문을 게재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만들어가게 된다.
김광제지사는 발기문에서 "2천만 국민이 단연(斷煙)을 통해 일본의 차관 1천3백만원을 갚는 것이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본인부터 흡연의 도구를 파쇄할 것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사람의 노예가 되는 마음으로 혈누(血淚, 피눈물)로써 호소"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위로는 고종황제로부터 아래로는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했던, 어머니의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었던 안중근의사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했으며 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로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전체국민의 적극적인 구국운동정신은 이후 1919년 3ㆍ1만세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1920~30년대 물산장려운동, 1960년대 이후 근대화 국민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으로, 1997년 IMF시절 금모으기 국민운동으로 승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동ㆍ출판ㆍ교육ㆍ의병활동 등 구국활동의 일선에 있던 김광제지사는 스스로를 동양의 아들(東洋子)이라 일컬으며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게 됐다. 그런 결과로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 전국적인 명성과 함께 근현대 역사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김광제지사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활동은 매우 미진하였으나 최근 학계에서 활발히 지사의 활동과 사상 업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경남대학교 박태일교수이다. 박교수는 최근 김광제지사가 1910~20년경 문무겸전한 풍모를 바탕으로 마산근대문학의 효시가 되었음을 자료를 통해 확인하고 “마산근대문학의 탄생(경진출판)”에 담았다.
저자인 박태일교수는 “동양자 김광제는 국채보상의거를 이끈 열혈지사”로 만년의 10년 가까운 시간을 마산의 근대문학 태동을 이끈 “마산근대문학의 효시”라며, “김광제지사가 엮은 마산문예구락부(외 6종 확인가능)는 통합창원의 바람직한 전통 계발과 새 전망을 얻는 데 좋은 나침반이 될 것”이라며 글을 맺고 있다.
정미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 한일병탄의 시기에 전체 국민운동으로 승화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며, 특히 김광제지사에 관한 역사적 재조명이 아직도 부족한 것에는 우리들의 책임도 있으리라. 이제라도 누구만의 문제라는 인식이 아닌 우리고장 보령이 낳은 구국계몽지도자인 “김광제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선양활동에 모두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독립지사김광제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채 준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