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가족 사랑과 문화유적 사랑
[기고]가족 사랑과 문화유적 사랑
  • 보령뉴스
  • 승인 2014.06.30 2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보령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여성보호계장 경감 유윤석

신록의 계절, 성주사지 !
이곳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하다.
성주산 자락의 평범한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서서 뒷산 쪽의 왕성하고 푸른 적송군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백제 웅비의 흔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성주산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은 것 같다. 족히 100년 가까이 되 보이는 소나무 밑둥은 여지없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홈이 파 있어 사람들이 송진을 받기 위해 절개한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송진을 전쟁에 사용하기 위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소나무에게 영원한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
일제는 수많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갔을 것이고 남아 있는 소나무마저도 온전한 게 없을 정도니 나라 잃은 설움이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1992년까지 무연탄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땅속까지 숲이 우거져 있었나 보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무성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나무도 무성하고 자연경관이 뛰어난 지역에 백제는 법왕 때 이곳에 오합사를 세우고 저 뒷산 너머에 있는 서해 최대의 방어진지인 지금의 오천 항에서 병사를 이끌고 신라나 고구려가 쳐들어오면 맞서 싸웠다.
그리고 병사들이 전사하면 이곳에서 혼백을 위로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망하자 흰말이 오합사에 들어가 슬피 울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도 한다.

백제가 패망하고 절이 방치된 것을 신라 말 무염스님이 선종을 크게 일으켜 오합사를 성주사로 바꾸었다.
무염스님의 일대기를 최치원이 글을 썼는데 보령 남포의 유명한 오석에다 글을 새기었다. 그게 낭혜화상탑비로 국보 8호가 되었다.
성주사지에는 국보 8호 뿐만 아니라 보물 19호, 20호, 47호의 석탑이 있다.
성주사는 근근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탑만 남았다.

성주사지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경비초소처럼 생긴 작은 사무실이 눈에 띈다.
다가가서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하니 아주머니 한분이 놀라신다.
아주머니는 성주사지의 문화해설사라고 한다.
하긴 이 적막한 두메산골에 관광객도 드물고 여성 혼자 사무실을 지키려니 두렵기도 할 것 같다.
문화해설사로부터 간단히 설명을 듣고 국보가 있고 보물이 3점이나 있는데 혼자 근무하시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대답한다.
입구에 사자상이 두개 있었는데 모조품으로 세운 것은 원래의 사자상을 도난 당 했다. 몇 년 전에는 석등을 쓰러뜨렸는데 CCTV가 없어서 쓰러뜨린 사람을 잡을 수 없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여기 오는 관광객들도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몇 년 전에 한옥으로 지어놓은 관리사무실은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다.
한편으로는 머드축제 같은 축제에 사용하는 비용을 조금 아껴 문화유적지에 경비원 한 두 명 쯤 배치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우리 조상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나라를 지키려 한 역사적 중요성을 알게 하도록 학생들이 이곳에 자주 와서 역사토론도 하면서 조상의 빛나는 유산을 소중히 알게 하는 것이 머드축제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다.

요즘 4대 사회악 근절 등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고 아동학대 등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소중히 사랑하듯이 우리의 조상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적을 내 가족처럼 사랑 했으면 좋겠다.

6월은 호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하여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웠다.
이렇게 어렵게 지켜온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 있는 문화유산을 내 가족처럼 쓰다듬고 어루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제 할일을 조금이나마 하는 것이 아닐까.
천년이 지난 우리조상들의 뛰어난 글과 우리고장 보령의 남포오석을 자랑할 만한 뛰어난 문화유적을 잘 가꾸어 나가지 못하고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조상들에게 떳떳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보령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여성보호계장 경감 유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