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복싱의 간판 한순철(28ㆍ서울시청)이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복싱 라이트급(60㎏) 8강전에서 "목숨을 걸고 링에 올랐다"고 할 이유는 많았다. 만약 4강에 오르지 못해 동메달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빠 복서'는 당장 군대에 가야 할 상황이었다.
런던으로 떠나기 전 한순철은 아내에게 약속했다.
"죽기 살기로 금메달을 따 올 테니 오빠만 믿어."
이런 한순철의 상황을 알기에 이승배 대표팀 감독도 "딸 생각해라" "군대 생각해라"며 그를 자극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 8강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단 가장 급했던 '군 문제'를 해결한 한순철은 이제 아내와 한 약속을 지킬 차례다. 게다가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복싱 대표 2명 중 한순철만 남았기에 그는 어깨에 '24년 만에 금메달 도전'이라는 한국 복싱의 운명까지 짊어졌다. 한국 복싱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리스트를 배출한 이후 16년 동안 결승 진출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은메달 주인공은 이승배 감독이다.
한순철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험난한 산을 두 번 넘어야 한다.
10일 오후 9시 15분(한국시간 11일 오전 5시 15분) 영국 런던의 엑셀 런던 사우스아레나에서 결승 진출을 놓고 맞붙는 에발다스 페트라우스카스(20ㆍ리투아니아)는 베일에 가려 있는 선수다. 라이트웰터급(64㎏)에서 라이트급(60㎏)으로 체급을 변경한 신예이기 때문이다. 세계 랭킹은 4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8강에서 세계 랭킹 1위 도메니코 발렌티노(이탈리아)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될 상대인 것이다. 그를 꺾어야만 한국 복싱의 숙원인 금메달에 도전할 수 있다.
속초 설악중 1학년 때 처음 글러브를 낀 한순철의 복싱 16년 인생은 지난했다.
복싱을 시작할 때만 해도 몸이 약했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참을성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복싱 인생은 한 번 큰 파도를 탔다.
어머니는 가족 생계를 위해 식당을 열었지만 살림은 늘 곤궁했다. 한순철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팀인 서울시청에 입단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는 맞수를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국제대회 성적은 신통치가 않았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밴텀급(54㎏) 은메달을 따며 기대를 모았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1회전에서 탈락했다. 체중 감량이 문제였다. 고교 졸업 후에도 키가 계속 자라는 바람에 178㎝나 되는 키로 밴텀급에 몸무게를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라이트급으로 변경했다.
베이징올림픽 때 1회전 탈락의 아픔을 겪어봤기에 라이트플라이(49㎏)급 16강전에서 패배한 신종훈(23ㆍ인천시청)이 악성 댓글에 힘들어하는 심정을 잘 안다. 이 일도 한순철이 금메달을 따야 하는 이유에 추가됐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그의 세계 랭킹은 19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서 세계 랭킹 2위 바즈겐 사파랸츠(벨라루스)를 넘어서면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한순철은 호쾌한 복싱을 하지는 않는다. 순간적인 받아치기에 능한 아웃복싱을 구사한다. 빠르게 내뻗는 오른손 스트레이트는 일품이다. 비록 그는 겉으로 보일 때는 아웃복서일지 모르지만 '멘탈 복싱'만큼은 앞만 보고 돌격하는 파이터형이다.
이번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한순철 의지도 무척 강하다.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 복싱 인기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꼭 금메달이 필요하다고 다짐하고 있다.
한순철에게 이번 올림픽이 어쩌면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동메달로는 너무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