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부모, 부모, 형제자매 등 가족 구성원과 함께 생활하며 은연중(隱然中)에 가족의 품성과 언행을 닮아가고, 가정의 잠재적 교육과정 속에서 인성이 형성된다. 자녀는 출생 후 가정이라는 비형식적(非形式的)인 학교에서 선생님인 부모와 가족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가 존댓말을 쓰면 자녀도 따라서 존댓말을 배우고, 부모가 인사를 잘하면 자녀도 부모처럼 인사를 잘하게 된다. 부모가 웃어른을 공경하는 효의 모범을 자녀에게 보이면 자녀도 효도할 것이다. 효(孝)는 백행의 근본으로 효하는 자는 어질지 않은 자가 없으며 의(義)를 지키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다. 부모와 웃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며 남을 존중하겠는가.
공자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고 했다. 부모는 자녀를 방임하지 말고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마음으로 가정을 돌보며 예절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유의할 점으로 첫째, 자녀들의 눈에 바람직한 예절로 비쳐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어려서부터 예절이 몸에 배도록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셋째, 계속 반복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넷째, 때와 장소와 시기에 맞는 상황을 설정해 지도해야 한다. 다섯째, 스스로 예절을 지키며 즐거움을 갖도록 칭찬과 격려를 해야 한다. 자녀들은 말보다 눈과 몸으로 배우기 때문에 부모가 시범을 보여 감화를 주며 말 없는 지도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자녀가 인사를 할 때 칭찬하며 반갑게 받아야 하는데 인사를 무시하거나 건성으로 받는다면 서운해서 인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또 자녀에게 선(善)과 악(惡),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폭력과 욕설이 잦은 가정이나 무관심이나 방임 속의 가정에서 자란 자녀의 대부분이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남에게 폭언과 폭행을 자행하는 문제 청소년이 되고 있다고 한다. 각종 불량 서클 학생들의 폭언, 폭행, 협박, 금품강요 등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이 이어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학교폭력의 일차적인 책임은 가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부모에게 있고, 이차적으로 학교에 있으며, 그 다음에 사회와 국가와 온 국민에게도 있다. 국가는 문제 청소년을 선도하고 비행을 예방하는 대책을 내놓고, 또 자녀들의 인성을 그르치는 인터넷 욕설 방송과 저질 언어의 댓글과 폭력성 인터넷 게임과 PC방과 게임방 등 유해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과 정화대책을 내놔야 된다. 학생인권도 고려해야 하지만 교사에게 학생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정치인은 물론 사회구성원 모두가 청소년 앞에서 가급적 막말과 폭행 등 정의롭지 못한 온갖 꼼수를 버려야 한다. 가정과 학교에서는 문제 학생을 사후에 제재하는 소극적 방법보다는 사전에 예방하는 적극적 방법으로 대처해야 한다.
가정의 달과 청소년의 달의 제반 행사가 일과성이지 않고 사랑과 존경과 축복과 배려의 마음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자녀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교육에 힘쓰며, 학생은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은 학생을 사랑으로 가르치며, 사회와 국가는 청소년을 바람직하게 선도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스트레스(stress)를 받는다. 더구나 신문(新聞)에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일은 제법 신경이 쓰인다. 글을 쓰는 것이 남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지식과 정보를 총동원(總動員)하여 힘든 시간을 거쳐 얻어낸 결실이다.
구백여(詩 제외) 편의 글을 쓰다 보니 어떤 내용은 이미 다른 글을 통해 썼던 내용인 경우도 있다. 체력과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은 터라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지혜롭게 나이에 맞는 글을, 사회에 기여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글을 쓸 때는 참으로 힘들었지만, 이런저런 과정(過程)을 거쳐 원고(原稿)를 마감할 때는 그렇게 기분(氣分)이 좋을 수가 없다. 글을 쓰라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쓰고 싶은 글이 많은지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푹 빠진 지 이십여 년 지났다.
글쓰기로 더위를 이길 수 있다. 글쓰기가 아니라 해도 무엇인가에 몰두(沒頭)하다 보면 더위를 이길 수 있다. 삼매경(三昧境)은 잡념이 없이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이다. 그런 경지가 더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하는데 덥다는 것은 잡념에 불과하다. 글쓰기 삼매경에 빠지면 더위를 이길 수가 있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人間)을 정확(正確)하게 만든다.
사십 년 넘게 함께 살아온 아내도 나의 글쓰기라는 중병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총을 줄 때가 많다.
글을 쓰는 일은 극도의 긴장을 요하는 정신노동이므로 막대한 체력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이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편의 글을 쓰고 난 후 느끼는 뿌듯함과 글을 쓰며 느끼게 되는 정신의 정화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다. 글을 쓰는 시간은 지나간 삶을 조용히 성찰하고 마음을 고요히 정돈하는 과정이며 앞으로 더 나은 삶을, 더 올바른 삶을,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신문사가 원고료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몇몇 신문사로부터 받은 원고료를 수재의연금 등의 불우 이웃 돕기 성금으로 모두 냈다. 왜냐하면 신문에 글쓰기를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돈을 받으면 사회봉사가 아님).
4월의 신부처럼 가볍게 걸었던 이 길, 초록의 계절이 어제인 양 눈에 선한데, 어느 사이 가을을 맞아 푸른 잎이 낙엽 되어 발아래 머문다.
낙엽 쌓인 산길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울창했던 숲보다 가을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산에 오르곤 했었는데, 정상에 올라 산 아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천하가 모두 내 세상 같아 기쁘다.
가을인가 했는데, 벌써 만추가 되어 초겨울의 문턱을 넘나들며 세월의 달리기라도 하듯이 빠르게 하루를 보낸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말이다.
파아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과 서산에 걸린 해를 보며 산을 내려오는데, 늦가을의 산뜻한 바람이 나의 등을 살며시 밀어준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기만 하다. 입에서 막 노래라도 나올 것처럼.
늦가을, 아름다운 단풍과 맑은 바람과 낭만과 즐거운 마음으로 가을의 서정이 하늘 아래 가득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 간에 지켜야 할 약속을 정해 놓았다. 그 약속을 사회규범이라고 한다. 규범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타율적 강제적 규범인 법과 양심에 따라 스스로 지켜야 하는 윤리적 자율적 규범인 도덕이 있다.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혼란에 빠뜨리는 규범 파괴 현상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우선이고 오직 나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지금껏 사회를 도덕적인 사회로 지탱한 여러 가지 제약 중 하나가 상호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물질적이건 정신적이건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부담을 갖게 된다. 그것은 유무형의 빚으로 남아 자신이 되갚을 때까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호의적인 어떤 것을 받은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악의적인 그 무엇을 받았을 때도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즉, 누군가가 나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내가 그에게 보복을 할 때까지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복수심이 자리 잡고 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언행을 했다면, 다른 사람도 내게 비슷한 응대를 할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망각한다.
자신의 이익이나 편의를 위해 타인에게 불이익이나 불편을 준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에게 던지는 부메랑(boomerang)이 될 것이다.
물은 그 아래를 들여다보면 낮은 데도 있고 깊은 데도 있고 온갖 것들이 그 아래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으나 수면은 언제나 수평(水平)을 이룬다.
물이 한꺼번에 많아져 급류를 이루면 수면이 높고 거칠어지는 것이 마치 인간 속의 뭔가가 넘쳐 화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방이 높이 보여 자신만 낮다고 생각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물이 너무 많아 흘러넘쳐 주위를 휩쓸어 버리는 것은 좁은 마음에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기보다는 해코지를 하려거나 내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언제든 낮은 데로 흘러 수평을 유지하려는 물의 속성처럼 우리네 마음도 물을 닮으려고 애써 노력하면 겸손과 평정의 유지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은 닿지 않는 곳, 미치지 않는 곳 없이 어디든지 간다. 때로는 살랑거리는 미풍(微風)으로, 때로는 휘몰아치는 폭풍(暴風)으로 간다.
봄날의 미풍(微風)은 마치 기분이 좋을 때 얼굴에 저절로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과 같고, 일한 후의 땀을 식혀 주는 여름철의 시원한 바람은 호탕한 웃음 같고 속 좁은 생각을 한 방에 날려버리기도 한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은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는 어른의 고언(苦言) 같기도 하고 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팔등신 미녀 같기도 하다.
겨울바람은 마치 냉소나 비웃음 같다. 삭풍이 나뭇잎을 떨구거나 가지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말이다. 냉소나 비웃음은 우리네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고 따뜻하던 마음을 차갑게 식히기도 한다. 하지만 삭풍도 언젠가는 잦아들듯이 냉소(冷笑)나 비웃음을 뒤로하고 여유로운 생각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면 나와 이웃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
바다는 육대주(六大洲)에서 밤낮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모두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는다. 사람도 마음을 바다처럼 넓게 가지면 다툴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물처럼, 바람처럼, 바다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은 나만의 부질없는 생각일까…
허영심은 사람을 수다스럽게 하고 자존심을 침묵하게 한다. 자애는 윤리적으로는 자기보존, 자기주장의 본능에 따르는 감정으로 제 몸을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다소 지나치면 거만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인간의 몸을 바로 세우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한 철학자는 자존심(自尊心)은 어리석은 자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라고 했지만, 자부심(自負心)은 어떤 일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가치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을 가지는 것으로 항상 타인의 감탄(感歎)에 의해서 강화되는 특성이 있다.
때로는 자존심(自尊心)이 예의의 관계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며 도덕과 윤리의 뼈대가 되고 바탕이 된다. 자존심은 그처럼 우리들에게 질투심(嫉妬心)을 불러일으키지만, 또한 그 질투심을 녹이는 구실도 하여 권위로 인한 질서에도 한몫을 한다. 인간의 마음은 알아서 깨닫는 지각(知覺)이 있어 사물을 만져보기도 전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촉각과 짐작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것은 바로 육신과 마음의 촉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한순간에 자존심(自尊心)이 붕괴되는 경우도 생긴다. 배고프고 아프고 추우면 인간의 본성(本性)은 결함을 충족시키려는 본능(本能)이 생겨 모든 것을 무시하고 죄의 길로 굴러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유행하는 말로,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라는 말도 있다.
취업(就業)은 의사나 판검사가 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대기업에 취업하면 최선이고, 사무관(5급 공무원)으로 취업하거나 교사로 취업하거나 중견기업에 취업하면 차선이며, 9급 공무원으로 취업하거나 순경으로 취업해도 선망의 대상이다.
■ 참고 사항
1. 대통령 연봉(2025년) : 2억6천258만1천원
2. 의사 연봉(2022년, 전공의 제외) : 3억100만원
3. 의사 연봉(2025년 전문의) : 4억원 이상(추정액)
4. 판사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3,536,500원
5. 검사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3,536,500원
6. 사무관(5급 공무원)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2,799천원
7. 교사(기본급, 9호봉(일반직 공무원 1호봉), 2025년) : 2,366천원
8. 주사(6급 공무원)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2,309천원
9. 9급 공무원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2,001천원
10. 순경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2,001천원
11. 경위 월급(기본급, 1호봉, 2025년) : 2,353천원
●시인․수필가 김병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