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참여형 인문 프로그램, 디지털 콘텐츠, AI 시대의 질문으로 확장하는 작업 추진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토정비결(土亭秘訣)은 1910년대 일제강점기 인쇄본이 유통되기 시작한 이후 100년 넘게 매년 빠짐없이 찍혀 온, 한국 출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장기 스테디셀러다.
명문당과 남산당 등 주요 출판사 증언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연간 1만~2만 부 이상이 판매됐고, 오늘날에도 해마다 비슷한 규모로 인쇄·유통되고 있다. 단순 합산만으로도 수백만 부가 민가와 서가에 깔려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일반 인문서나 문학서가 1만 부 판매를 넘기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토정비결』의 기록은 한국 출판문화사에서 예외적인 성취로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출판 시장이 ‘소량·다종’으로 급격히 재편된 최근에도 이 책의 발행 부수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토정비결』의 진정한 힘은 판매 부수가 아니라 읽히던 방식에 있었다.
정초가 되면 마을 사랑방에 사람들이 모였다. 장터를 오가던 이웃, 농사일을 마친 농부, 아이를 업은 어머니까지 둘러앉아 책장을 넘겼다. 그 자리에서 『토정비결』은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묻고 위로하는 매개였다.
“올해는 건강할까.”“장사는 잘될까.”“자식 혼사는 어떻게 될까.”질문이 모이면 공감이 됐고, 공감은 공동체의 희망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와 문화연구자들은 『토정비결』을 단순 점서(占書)가 아닌 민중의 생활철학서, 혹은 인문생활서로 재평가하고 있다.
성경이 신앙 공동체의 삶을 기록하였고 불경이 수행자의 마음을 담고 있다면 『토정비결』은 민중의 현실을 기록한 책이었다.
오늘날 인공지능(AI)은 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하고, 알고리즘으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토정비결』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는 ‘맞히는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이 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당신은 올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기다림과 절제는 언제 필요한가.”“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질문을 남기고, 그 답을 각자의 삶에 맡기는 방식. 이는 정답을 계산하는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한 인간의 능력이자, 『토정비결』이 지닌 진짜 ‘비결(秘訣)’이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사상과 애민 정신이 전해 내려온 곳, 충남 보령에서는 이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보령국가유산지킴이봉사단(단장 임인식)은 『토정비결』을 단순 관광 콘텐츠가 아닌 국가 인문유산 기반 문화자산으로 재 정의하고, 시민 참여형 인문 프로그램과 디지털 콘텐츠, AI 시대의 질문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보령시 관계자는 “『토정비결』은 길흉화복을 점치는 책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기록한 생활철학서”라며 “오늘의 시민에게 질문을 던지는 인문유산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백만 부가 인쇄돼 민중의 손에서 손으로, 정신에서 정신으로 전해진 책. 가장 많이 펼쳐졌지만 가장 조용히 오래 읽힌 책, 『토정비결』.
보령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과거를 소비하는 유산이 아니라, 미래를 묻는 국가 문화유산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자료제공 : 보령국가유산지킴이봉사단. 토정마루 이행수 대표.백남균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만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