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천막당사에 이어 8년 만에 다시 당을 구한 박위원장은 일찌기 대선 전초전으로 바꾸면서 "박근혜선거"에 무게를 싫었고 MB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으로" MB심판론"을 희석 시켰다.
그러므로 인해 " 대구, 경북, 울산, 경남을 비롯하여 강원, 충청도까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또한 박 위원장의 최대 자산인 원칙. 신뢰가 중도층을 이끄는데 성공했다. 한.미FTA와 제주 미군기지 건설등 특히 2년전 세종시 원안을 고수했던게 충청권 선거에서 큰 자산이 됐다. 박 위원장은 대전 유세에서 " 충청은 제 어머니 고향 이기도 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가 정치생명을 걸었던 곳"이라며 중도층을 새누리당으로 끌어 들였다.
여기에 공천과정에서 강한 리더십을 활용해 과감한 선택을 자주했다. "공천된 후보라도 문제가 생기면 공천을 박탈하겠다"는 메세지를 던지면서 5.18민주화운동과 4.3제주항쟁을 폄훼한 이영보후보나 여성 비하발언 논란을 빚은 석호익 후보를 교체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대통령 탈당 등 청와대와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도 정책과 언행의 '차별화'를 통해 유권자에게 쇄신의 이미지를 주려는 전략을 구사했고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의 무소속 출마를 막은 것도 박근혜 리더십이다.
이렇게 새누리당 성향표를 온전히 붙잡았고, 조화로운 이미지는 증도층에서 표를 끌어왔다. 신율 명지대교수는 "성급하게 현 정권과 차별화 전략을 펴면 심판론에 말린다는 것을 박 위원장은 잘 알고 이었다"며 '민간인 사찰에서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등 대처를 잘했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강한 대중적 인기를 십분 활용해 현장유세로 분위기를 전환시켰고 공식선거 운동이 시작 되자마자 곧바로 부산을 시작으로 하루에 500km이상 이동하는 강행군을 펼졌다. 13일간의 선거운동 기간 부산은 5번 찾았고, 청주.대전과 강원도는 3번을 찾았다.
현장유세 성과는 두드러졌다. 충청과 강원 보수층, 중도층이 반응했고 특히 야당과 양분했던 충청권은 단번에 새누리당 강세지역으로 돌아섰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선출 이후 야성이 강했던 강원 9개 지역구가 모두 새누리당 품에 안겼다. 그의 선거능력은 늘 현장에서 유권자들과의 스킨십에서 시작되었고 그가 다녀가는 곳마다 약 5~6%의 지지율 상승효과를 보이며 이번 선거의 주인공이 되었고 2004년 "탄핵풍"과 맞설 때부터 큰 선거에서 보여준 "선거의 여왕"다운 그의 장점이 돗 보였다.
이제 4.11선거를 통해 남긴 과제를 풀어야 하는 또 다른 정치적 실험대에 놓였다. "지역주의에 기댄 절반의 승리"로 영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영남권과 강원의 표심을 사로잡고 모성본능을 자극해 일부 충청의 표심도 사로 잡았지만 수도권을 야당에 내주면서 수도권의 젊은 민심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년말 대선을 앞둔 박 위원장은 고민이 미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영남 일당독주와 호남 진보 외연 확대에 따른 표쏠림 현상과 이념색이 짙어지고 동.서로 갈린 분열과 야권 지지 성향의 2030 젊이세대들의 마음을 어떻게 어우를 것인가에 따라 대선 정국이 요동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이룬 야권연대의 실책에 따른 반사이익에 의존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의석수는 1당 이지만, 새누리당 출마 의원들의 득표는 932만 4911표(43.3%)가 민주당. 통합진보당 출마자들의 득표 944만7351표(43.9%)보다 12만2440표 적은 것도 대선을 앞둔 박 위원장으로선 부담이 될 것임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