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 발상지【외연도】
[기고]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 발상지【외연도】
  • 보령뉴스
  • 승인 2020.08.2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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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보령시의회 의원 편삼범
헌종12년 (1836년) 프랑스함대 3척 외연도에 출현
고대도 귀츨라프선교사에 이어 외연도의 역사 재 조명 필요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던 해 프랑스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1839년 9월 21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한데 대하여 프랑스 정부는 학살책임을 묻기 위해 주중 및 인도불국함대사령관 해군소장 세실제독에게 조선해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으로 세실 사령관은 클레오파트르(Cléopatre)호를 이끌고 이 해 5월 20일 마카오를 出船, 도중에서 빅토리외즈(Victorieuse)호와 사빈느(Sabine)호를 합류시켜, 제주도를 거쳐 8월 6일 충청도 洪州 땅 외연도에 나타났다(당시 3척의 군인은 870명이 승선).

그는 원래 조선의 대신과 면담하고 3인의 선교사 학살에 관해 해명을 요구하는 국서를 조선정부에 전달하려고 했으나 외연도 현지인들의 거절로 봉서를 궤짝에 넣어 외연도에 물이 닿지 않는 바위에 놓고 떠나려다 9일 외연도주민대표 6명과 클레오파트르호 회의실에서 대화한 후 세실 제독은 자신의 메시지가 재상에게 전달될 것이라 믿고 그 다음해에 조선정부의 答書를 받으러 오겠다고 전하고 10일에 외연도를 떠났다.

프랑스는 이듬해 1847년(헌종 13년) 조선 정부의 회신을 받고자 주중 및 인도불국함대기지 부함대장 라피에르 해군 대령이 군함 2척(모함/글루와르호, 소함/빅토리외즈호)을 이끌고 8월10일 만경지방 신시도 후양에 이르렀으나 강풍을 만나 완전 침몰(560명의 군인 중 2명 사망)했다.

지난해의 프랑스 정부가 보낸 국서에 대한 조선정부의 회문 요지 내용은 『불함 3척이 외연도에 와서 신부3인의 처형에 대한 문책, 모년 7월에 불함 2척이 회문 받으러 왔다가 좌초한 사실, 이에 대한 회문을 청국에 전달한다』라고 항의문에 대한 답변을 보내 내정 간섭을 경고했다.

이때 프랑스와 조선이 주고받은 문서는 조선이 서양과 공식적으로 주고받은 최초의 외교 문서로 기록된다.

보령시가 이제부터라도 적극적 나서서 외연도 이양선으로 인한(외연도 주민과 프랑스인과의 대화 내용. 프랑스 정부가 조선정부에 보낸 외교문서 내용, 3척의 함대 재원 등) 역사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들어 가길 기대해본다.

-. 프랑스 자료 :프랑스 국립공문서보관소에 소장된 필사본문서

-. 조선 측 사료: 헌종실록(憲宗 實錄 권 13), 일성록(日省錄 憲宗),

승정원일기(承政院 日記 道光), 충청병영계록(忠淸兵靈啓錄 道光26 年), 비변사담록(備邊司膽錄 憲宗 丙午年)등

 

 

▶프랑스의 장 밥티스타세실 제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