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亭秘訣』 사랑방의 지혜, 국가유산이 되다!
-토정비결에 담긴 민중의 철학…사람 중심 시대정신과 만나다. -보령국가유산지킴이 봉사단…사랑방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린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진 삶의 인문서
“올해는 몸을 아끼세요.”“사람을 얻는 운입니다.”“조급해 말고 때를 기다리세요.”
섣달 그믐 전후 설 연휴의 저녁, 조선시대의 사랑방의 익숙한 풍경이다.
등잔불 아래 둘러앉은 친지와 가족들, 그리고 조심스레 펼쳐지는 낡고 헤어진 한 권의 책을 통해 평범한 사람의 한 해를 들여다보는 책 ‘토정비결’이 있었다.
이 말들은 미래를 단정하는 예언이 아니었다.
수백 년 전 사랑방에서 시작된 이 생활 인문서 토정비결(土亭秘訣)이 오늘날 단순한 민속을 넘어, 사람을 중심에 두는 시대의 가치와 다시 만나고 있다.
“당신은 올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요?.” 농부와 장사꾼, 어부와 머슴, 그리고 이름조차 기록에 남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까지, 토정비결은 신분을 묻지 않고 태어난 날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했다.
“욕심을 줄이면 길하다”, “인덕이 따르는 해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는 문장들은 운명을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마음의 언어였다.
그래서 토정비결은 서가 속 고전이 아니라 사람들 가슴속에 남은 생활의 철학으로 이어져 왔다.
설날 사랑방에서 펼쳐지던 토정비결은. 가문도, 재산도, 학식도 묻지 않았다.
오직 태어난 해와 달, 그리고 날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비췄다. 누군가를 신분이 아니라 ‘백성’이라 부르는 경험, 그것은 제도를 뒤집는 혁명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조용한 평등의 순간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토정비결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무슨 성씨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로만 불리던 시대에 “올해는 몸을 아끼라”, “귀인을 만난다”, “인덕이 따른다.” 은 말은 관계 속 역할이 아닌, 한 사람의 삶에게 건네는 조언이었다. 겉으로 평등을 외치지 않았지만 사람의 내면에서 남녀를 나누지 않는 감각을 길러낸 생활 속 인문학의 힘이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신분을 넘어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토정비결은 양반도, 상민도, 노비도 같은 방식으로 읽혔다.
운(運)의 흐름 앞에서 사람은 신분이 아니라 하늘 아래 태어난 한 인간으로 다뤄졌다. “당신의 올해는 이렇다”라는 말은 곧 “당신의 삶도 이 세상의 질서 안에 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이는 신분 사회 속에서 드물게 드러난, 사람 존재 자체를 향한 깊은 존중의 언어였다.
그래서 토정비결은 학자의 서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살아남았다.
많은 고전이 글 속에 머무는 동안, 토정비결은 장터와 사랑방, 안방과 마을을 돌았다. 글을 모르는 이에게는 누군가 읽어주었고, 이웃은 함께 들으며 새해의 마음을 다잡았다. 이 전통은 위에서 내려온 지식이 아니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진 삶의 문화였다. 이론보다 따뜻함이, 논리보다 체온이 더 깊이 스며든 이유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AI)이 미래를 예측하고 데이터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물음은 조선의 사랑방에서 토정비결을 펼치던 백성들의 질문과 다르지 않다.
토정비결이 다시 읽히는 이유는 신비로움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람 중심의 관점 때문이다. 성공보다 균형을, 속도보다 기다림을, 예측보다 마음의 준비를 말해주는 지혜. 이는 데이터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철학이다.
이 같은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충남 보령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회장 최호운) 소속 보령국가유산지킴이 봉사단(단장 임인식)은 국가유산을 눈에 보이는 문화재에만 두지 않는다.
사람의 삶 속에서 이어져 온 정신과 태도까지 지켜야 할 유산으로 바라본다. 강연과 시민 참여 프로그램, 체험 행사와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사랑방의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전통 보존을 넘어 사람 중심 사회를 향한 가치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결국 토정비결은 미래를 맞히는 책이 아니라,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도 충분히 소중하다”고 말해준 인문 유산이다.
그 따뜻한 시선이 수백 년을 건너 이제 보령의 시민들에 의해 다시 오늘의 삶 속에서 숨 쉬고 있다. AI가 계산하는 시대일수록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지혜는 더욱 빛난다. 사랑방의 작은 등잔불 아래에서 시작된 이 유산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의 삶은, 여전히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