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년 설날, 보령이 다시 펼친 『토정비결』 …“예언의 책에서 질문의 책으로”
-삶의 위로와 방향을 건네는 생활 철학서…‘土亭秘訣’
병오년 설을 앞두고 충남 보령이 뜻밖의 이유로 주목받고 있다.
해마다 새해 운세를 점치는 책으로 소비되던 『토정비결(土亭秘訣)』이 이제는 ‘삶을 묻는 질문의 책’으로 새롭게 해석되며, 그 발원지 보령에서 인문정신과 문화관광이 결합된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회장 최호운) 소속 보령국가유산지킴이봉사단(단장 임인식)은 설 연휴를 맞아 토정 이지함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인문 강연, 유적 탐방,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7년째 운영한다.
퇴계와 율곡이 하늘(天)의 길을 세웠다면, 토정은 땅(地)의 길을 열었다
조선 성리학의 거목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국가의 정신 질서를 세운 사상가였다면, 토정 이지함은 백성의 삶 속으로 들어간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혼란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은 책, 백성이 지켜낸 인문유산 ‘토정비결’
외세의 침탈과 사회 붕괴 속에서 종말론과 예언 사상이 난무하던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민중 곁을 지킨 책 『토정비결』은 특정 종교의 경전도, 권력이 만든 통치 이념서도 아니었다.
국가가 보급하지도, 누군가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방과 장터, 민가의 책꽂이에서 백성에 의해 필사되고 전해졌다.
이 책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늘의 비밀이 아니라 삶의 위로와 방향을 건네는 생활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정비결』은 특정 신앙의 책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중이 스스로 선택해 이어온 집단 지성의 기록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운명을 단정하는 책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 ‘토정비결’
보령에서 열리는 이번 인문 프로그램은 『토정비결』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해석한다.
미래를 맞히는 예언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질문의 형식을 지닌 고전이라는 것이다.
“남의 운명을 묻지 말고, 네 삶의 길을 돌아보라.”
이 메시지는 인공지능이 미래를 예측하는 오늘의 시대에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예측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성찰이라는 해석이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국부론’…나라의 부는 백성의 삶에서 나온다
이번 행사에서는 토정 이지함 선생의 사상을 ‘조선의 국부론(國富論)’이라는 관점에서도 조명한다.
토정은 국가의 부강함이 국고의 축적이 아니라 백성의 삶의 안정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는 염전 개발과 상업 장려, 구휼 정책 등 실질적인 민생 대책을 제시하며 생산과 유통,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서양 경제사상보다 앞선 시기의 생활경제 철학으로 재평가된다.
토정의 국부론은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나라가 먼저가 아니라, 백성이 먼저 사는 것.”
김동일 보령시장 “토정 정신은 사람 중심 도시의 뿌리”
김동일 보령시장은 이번 설 명절 인문행사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백성 속에서 답을 찾은 실천적 지도자였습니다. 보령은 토정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려 사람 중심의 도시, 삶을 돌보는 행정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토정비결』이 운세를 보는 책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읽히는 도시, 그 출발점이 바로 보령입니다.”
김 시장은 문화유산이 과거 보존을 넘어 현재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 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자산이 된다며, 보령을 인문정신과 관광이 결합된 사람 중심 문화도시로 발전시키겠다는 비전을 강조했다.
설날, 관광이 아닌 ‘사유 여행’이 시작되는 도시
병오년 설 연휴 기간 보령에서는 성주사지와 토정 관련 유적, 지역 문화공간을 잇는 인문 스토리텔링 탐방이 운영된다.
가족 단위 방문객부터 청년 세대까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설 명절을 단순한 휴식이 아닌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관광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풍경을 소비하는 관광에서 의미를 체험하는 인문관광으로의 전환”이라고 평가한다.
K-팝 다음은 K-인문한류
K-팝과 K-드라마가 세계인의 감성을 사로잡았다면 이제 세계가 궁금해 하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지탱하는 철학이다.
속도보다 균형,경쟁보다 조화,욕망보다 절제,불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마음가짐.
이 정신이 바로 『토정비결』에 흐르는 사유이며 토정 이지함의 애민 철학에서 비롯된 한국적 삶의 미학이다. 보령에서 시작된 이 움직임은 K-콘텐츠를 넘어 K-인문정신, 곧 K-인문한류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OK보령에서 다시 시작되는 질문 『토정비결』은 더 이상“올해 운이 좋을까”를 묻는 책이 아니다.대신 이렇게 묻는다.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