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거기 반대와 여기반대가 이렇게 다를 수가
[칼럼]거기 반대와 여기반대가 이렇게 다를 수가
  • 보령포럼 권윤석대표
  • 승인 2014.10.2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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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발매소를 반대한다는데···
거긴 송전탑으로 주민이 죽어 나가는데
여긴 거기보다 송전탑이 더 많다는데
거긴 강제이고 여긴 안 해도 된다는데
거긴 네 마음, 여기는 내 마음인데
거기와 여기는 여전히 헷갈리는 삶

오래 살겠다는 게 아냐 건강하게 살겠다는 거지, 입에 달고 삽니다. 이게 아마 우리의 일상일 듯싶습니다. 그렇듯 아파 눕지 않고 병원 신세 덜 지며 살겠다는 게 아주 작은 바람이기도합니다.

소망을 달고있는 건강을 얘기 하다 보면 누구랄 것 없이 첫마디가 환경입니다. 그래 얼핏 담배입니다. 피우는 이의 건강에 그렇게 해롭다는데도, 그래서 못 피우게 담뱃값을 올리겠다는데도 막무가냅니다.

그 근처도 건강에 해롭다는데 그 근처인 우린 말리지 못합니다. 그게 피워야 한다는 강제가 아니어서 입니다. 피우는 이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피우는 이의 건강이지 내 건강이 아니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엉뚱해집니다. 대한민국이 그 담배를 만들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더욱 이걸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기에는 그런 선택에 대항 할 명분에서 밀립니다. 그게 곧 선택이 품은 고유의 권리에 자유가 보태진 불문율이어서 일겁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보령은 이 고유의 권리와 자유가 함께인 선택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도전 받고 있다는 게 더 나은 표현이 될 것 입니다.

그런 보령은, 청정해역에서 내뿜는 시커먼 매연, 삶의 한 복판으로 내 지른 철탑, 거기 주렁주렁 매 달린 고압선, 그 그늘에 사는 또 다른 보령의 건강은 기왕에 거기 터 잡아 살아 온 이들의 선택이 아녔습니다.

하지만 보상이란 떡에 그 흔한 피켓시위마저 잦아들었습니다. 건강이라는 필연의 갈망에 강제된 선택이 쾌재입니다. 보령인들은 아무도 이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내일이 아니라는, 내 삶이 아니라는 곁의 생각일 것이 아직도 보령입니다.

죽음이 진행형인 북쪽 보령도 있습니다. 청소에는 WHO지정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이 널 부러진 석면 폐광지가 노천입니다. 석면이 바람타면 숨 쉴 때 마다 폐에 들이 찬다는데, 그렇게 찬 석면가루로 ‘폐병'이라며 죽어 간다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삶이 선택의 여지가 없음에도, 강제에 입 닫고 눈 감은 보령입니다. 선택이 강제에게 밀린 보령입니다.

위 두 삶 모두 거기 사는 이유가 거기 사는 당사자들의 선택으로 보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거기 살아왔고 지금도 거기 살고 있는 그 이유만으로 죽음으로 내 몰리는 선택이 강제되고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미끼로도 안 쓰입니다.

강제가 아닌 선택은 당사자의 마음먹기이지 그 어느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토를 달아 옳고 그름에 선을 그어서는 안 되는 음유의 칙이 작용합니다. 그게 바로 선택이 지닌 고유의 권리입니다. 그 권리에 토를 달거나 헤아리는 행위는 선택케 하는 동기 부여일 뿐 그 선택을 지정, 갈무리 하려는 시도는 선택의 권리에 강제를 버무리려는 행위, 그 마음먹기 자체가 위험일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보령은 그럼에도 이러면 안 된다며 선택이란 고유의 영역에 옳고 그름으로 하물며 칼을 대고 있습니다.

여기입니다. 화상경마장(공식 명칭은 ‘한국마사회 장외 발매소’). 이름마저 사행성 도박장이라 지어 부릅니다. 대천해수욕장에 장외 발매소를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가 귀 따갑습니다. 이유는 도박장이라는 겁니다. 그럴겁니다. 돈 내고 돈 먹기이니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 걸 하겠다는 이의 선택이지 그걸 해야만 한다는 강요나 강제는 아닙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도 당사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대한민국 법이 허용한 오로지 선택에 말입니다.

여기에 으르면 우리는 또 로또 판매장이 사행성 도박장이 아닌가에 꽂히게 됩니다. 돈 내고 돈 먹기인 같은 행위여서 말입니다. 이런 맥락이 아니라 해도 반대 하는 이들의 반대 주장에는 선택이라는 자유인의 고유권한이 차별화되고 있다는 이중성에 거듭 의아해집니다. 도박이라고 지칭한 그 걸 하고 안 하고는 자연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도박이라 칭했으니 그게 갖는 속성의 폐해를 줄여 나간다는 건 우리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그 뿐입니다.

밀양이 송전탑으로, 여주 이천이 변전소 설치 반대로 거기 주민이 죽어 나가고 생업마저 뒤로 물렸는데 여기 보령은, 여기에도 송전탑, 밀양보다 더 많다는데 반대의견 하나 없습니다. 석면 분진으로 사람이 죽어 간다는데 옳다 그르다, 좋다던가 반대한다는 의사 표지판 하나 없습니다. 강제에는 입 다물고 선택에는 두 팔 걷은 보령의 반대는 그렇게 갈구하는 건강인데, 거기 대 못질에는 슬쩍 눈 감아 주는 그 아량이, 그 속내가 무척 궁금합니다. 선택의 자유를 강제로 막으려 하는 여긴 여전히 보령입니다. 개인이 선택해야하는 몫의 권리가 침해 되어지는 여긴 보령입니다.

거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인 건강인데 여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입니다. 거긴 선택이 묵살된 강제인데 여긴 여전히 당사자의 몫, 선택입니다. 거긴 내 마음이 아닌데 여긴 내 맘입니다. 그래선지 거긴 그걸, 송전탑을, 변전소를 목숨 걸고 반대하는 현재 입니다. 하긴 이 진행형에 한가한 이는 ‘내집 뜰에는 안된다’는 님비(Not In My Back Yard)현상을 거론하며 거기 속을 뒤집어 놓는,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는 이도 있긴 합니다. 이 이에게는 거기 살아봐라 가 맞습니다.

우리 보령은 지금 건강으로 반대하는 거기와 같은 반대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꼼꼼히 챙겨 봐야 할 즈음입니다. 더욱, 반대 하는 이들은 혹시 <존재의 의미>로 반대란 무리수를 두고 있는 건 아닌지도 말입니다. 한 번 둘러보세요. 거기 반대와 여기 반대가 왜 다를까로 기준이면 훨씬 수월해지리란 짐작입니다. 어느 걸 반대해야 하는지가.

보령포럼대표 권윤석